이란 봉쇄와 중동 파병, 오일쇼크의 재림인가

이란 봉쇄와 중동 파병, 오일쇼크의 재림인가

오늘의 사건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강화하며 중동 지역에 수천 명의 추가 병력을 파견했다. 이번 조치는 이란의 석유 수출로를 완전히 차단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호르무즈 해협과 수에즈 운하 인근에 배치된 미군은 이란 유조선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다. 글로벌 원유 가격은 즉시 배럴당 10달러 이상 급등하며 시장의 긴장감을 드러냈다. 역사 속 오일쇼크들이 어떤 파장을 불러왔는지 되돌아볼 때가 왔다.


역사적 사건

1973욤 키푸르 전쟁과 첫 번째 오일쇼크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며 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아랍 산유국들은 즉시 보복에 나섰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OPEC 회원국들은 서방국가들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원유 가격은 배럴당 3달러에서 12달러로 4배나 급등하며 세계 경제를 충격에 빠뜨렸다.

미국 경제는 즉시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에 빠져들었다. 1974년 인플레이션율은 12%를 넘어서며 동시에 실업률도 급상승했다. 자동차 산업은 연료 효율성이 떨어지는 대형차 판매 급감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GM과 포드는 수만 명의 직원을 해고해야 했고 크라이슬러는 파산 위기에 몰렸다.

일본과 독일은 이 위기를 에너지 효율성 혁신의 기회로 삼았다. 도요타와 혼다는 연비가 뛰어난 소형차로 미국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지멘스와 일본의 도시바는 에너지 절약 기술에 막대한 투자를 단행했다. 이들 기업은 훗날 글로벌 에너지 효율성 기술의 선두주자로 부상하게 된다.

닉슨 행정부는 전국적 에너지 절약 캠페인을 벌이며 고속도로 제한속도를 시속 55마일로 낮췄다. 주유소마다 긴 줄이 늘어섰고 홀짝제 주유가 실시되는 등 미국인들은 처음으로 에너지 부족을 체감했다. 이 위기는 미국이 중동 석유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에너지 자립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979이란 혁명과 두 번째 오일쇼크

1979년 1월, 팔레비 국왕이 축출되고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혁명정부가 이란을 장악했다. 세계 제2위 석유 수출국이던 이란의 원유 생산이 하루 600만 배럴에서 50만 배럴로 급감했다. 같은 해 11월 테헤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가 발생하며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됐다. 원유 가격은 배럴당 13달러에서 34달러로 1년 만에 160% 폭등했다.

카터 행정부는 경제적 혼란 속에서 속수무책이었다. 1980년 인플레이션율은 13.5%를 기록하며 미국 역사상 최고치를 달성했다. 연방준비제도는 금리를 20%까지 끌어올렸지만 물가 상승을 막을 수 없었다. 자동차 판매는 30% 급감했고 주택 건설은 거의 중단 상태에 이르렀다.

일본은 이번에도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냈다. 에너지 집약적 중화학공업에서 반도체와 정밀기계로 산업구조를 전환했다. 도요타는 '저스트 인 타임' 생산방식으로 연료비를 최소화하며 미국 시장 점유율을 30%까지 끌어올렸다. 소니와 파나소닉은 저전력 전자제품으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는 북해 유전 개발을 가속화하며 에너지 자립도를 높였다. 노르웨이 역시 북해 석유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국부펀드의 토대를 마련했다. 반면 개발도상국들은 외채 위기에 빠져들었다. 브라질과 멕시코는 석유 수입비 급증으로 국가부도 위기에 몰렸고 1980년대 '잃어버린 10년'의 서막이 올랐다.


1990걸프전과 유가 폭등의 경제적 파장

1990년 8월 2일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하며 걸프전이 시작됐다. 세계 석유 매장량의 20%를 보유한 두 나라의 생산이 중단되자 원유 가격은 즉시 두 배로 뛰어올랐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에 50만 명의 대군을 파견하며 석유 공급망 보호에 나섰다. 전쟁 공포가 확산되자 뉴욕 증시는 한 달 만에 20% 폭락했다.

일본 경제는 이미 버블 붕괴의 조짐을 보이던 상황에서 유가 급등이라는 추가 타격을 받았다. 닛케이 지수는 1989년 3만8915포인트에서 1990년 말 2만3848포인트로 38% 폭락했다. 부동산 가격도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고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됐다. 소니와 도시바 같은 전자업체들은 해외 공장 이전을 가속화하며 생산비 절감에 나섰다.

독일은 통일 비용 부담과 유가 급등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동독 지역 재건을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야 했던 독일 정부는 인플레이션 압박에 직면했다. 분데스방크는 금리를 대폭 인상했고 이는 유럽 전체의 경기침체를 불러왔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1992년 유럽통화제도에서 탈퇴하는 등 통화 위기까지 겹쳤다.

미국은 전쟁 승리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는 큰 타격을 받았다. 1991년 3월 전쟁이 끝났지만 경기침체는 계속됐고 실업률은 7.8%까지 치솟았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경제 문제로 1992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에게 패배했다. 이 사건은 석유 가격이 정치적 운명까지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가 됐다. 미국은 이후 전략 석유비축량을 7억 배럴까지 늘리며 에너지 안보를 강화했다.


2019트럼프의 이란 제재와 호르무즈 해협 봉쇄 시도

2019년 5월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산 원유 수입에 대한 모든 예외조치를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중국, 인도, 일본 등 주요 수입국들도 이란산 원유 구매를 중단해야 했다. 이란의 원유 수출량은 하루 250만 배럴에서 20만 배럴로 92% 급감했다. 이란 경제는 전년 대비 9.5%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며 극심한 불황에 빠졌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위협하며 미국에 맞섰다. 혁명수비대는 영국과 일본 유조선을 나포하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세계 석유 운송량의 21%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충돌 가능성에 유가는 20% 급등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여분 생산능력을 가동해 공급 부족분을 메우려 했지만 시장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은 이란산 원유 의존도가 높아 큰 타격을 받았다. 한국은 이란산 원유 수입 비중이 전체의 4%였지만 대체 공급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아베 총리가 직접 테헤란을 방문해 중재를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양국 모두 중동 의존도를 줄이고 공급원 다변화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중국은 이란 제재를 공개적으로 무시하며 원유 수입을 지속했다. 선박 추적 시스템을 끄고 공해상에서 환적하는 등 다양한 우회 방법을 동원했다. 러시아 역시 이란과 에너지 협력을 강화하며 미국 제재에 맞섰다. 이 과정에서 달러 중심의 국제 결제시스템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유로화와 위안화를 활용한 석유 거래가 늘어나며 달러 패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생각해볼 점

중동 파병과 이란 봉쇄라는 오늘의 뉴스는 반세기 동안 반복된 에너지 지정학의 연장선상에 있다. 1973년부터 2019년까지 네 차례의 석유 위기는 모두 중동 지역의 정치적 격변과 맞물려 일어났다. 미국의 군사개입이 단기적으로는 유가 안정에 기여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큰 불안정성을 키워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진정한 에너지 안보는 군사력이 아닌 공급원 다변화와 신재생에너지 전환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