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합병 규제 완화, 유럽 챔피언 기업 육성의 역사적 배경
오늘의 사건
유럽연합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진 자국 기업들을 위해 합병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과 중국의 거대 기업들이 시장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유럽만의 '챔피언 기업'을 만들겠다는 의지다. 이는 단순한 규제 정책 변화가 아닌, 경제 블록 간 패권 경쟁의 새로운 국면이다. 자유시장 원칙을 고수해온 EU가 국가 주도 산업정책으로 선회하는 전환점이기도 하다. 과거에도 비슷한 위기감이 유럽 경제정책의 대전환을 이끌어낸 순간들이 있었다.
역사적 사건
1957로마조약과 유럽 경제통합의 시작
1957년 로마조약 체결은 유럽 6개국이 경제통합을 통해 미국에 맞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유럽 각국은 개별적으론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프랑스와 독일은 석탄철강공동체를 시작으로 더 큰 경제적 연대를 모색했다. 이는 단순한 무역 협정이 아닌 정치적 통합을 염두에 둔 전략적 선택이었다.
로마조약은 관세 철폐와 자본 이동 자유화를 통해 유럽 내 거대 시장을 만들어냈다. 독일의 중화학공업, 프랑스의 항공우주산업, 이탈리아의 자동차산업이 국경을 넘나들며 규모의 경제를 실현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항만과 물류 허브로 발전하며 유럽 경제의 혈관 역할을 했다. 룩셈부르크는 금융 센터로 자리매김하며 각국의 비교우위가 통합 시장에서 극대화됐다.
하지만 초기 유럽경제공동체는 농업 보호주의와 각국 이익 충돌로 한계를 드러냈다. 프랑스는 공동농업정책을 통해 자국 농민을 보호하려 했고, 독일은 제조업 수출 확대에 집중했다. 영국은 1973년까지 가입을 미루며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경제통합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로마조약은 유럽이 하나의 경제 블록으로 움직일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50년간 이어진 유럽통합의 출발점이자 오늘날 EU 합병 규제 완화의 역사적 근거가 됐다. 경제적 연대를 통한 글로벌 경쟁력 확보라는 기본 철학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 방법론이 자유경쟁에서 전략적 육성으로 바뀌고 있을 뿐이다.
1986단일유럽의정서와 거대 시장의 완성
1986년 단일유럽의정서는 유럽을 하나의 거대한 내수시장으로 만든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1992년까지 모든 국경 장벽을 철폐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담겨있었다. 상품, 서비스, 자본,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4대 자유'가 핵심이었다. 이는 당시 일본의 제조업 공세와 미국의 금융 패권에 맞서는 유럽의 대응책이었다.
단일시장 프로젝트는 유럽 기업들에게 3억 명이 넘는 거대 시장을 안겨줬다. 독일 자동차 기업들은 유럽 전역으로 생산기지를 확산시키며 규모의 경제를 달성했다. 프랑스 통신업체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영국 금융회사들은 유럽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유럽 물류의 허브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단일시장은 역설적으로 기업 간 합병을 어렵게 만드는 부작용도 낳았다. 경쟁 정책이 강화되면서 시장 지배력 집중을 막는 규제가 촘촘해졌다. 유럽 위원회는 독점 방지에 집중하며 대형 합병을 까다롭게 심사하기 시작했다. 개별 기업의 성장보다 시장 경쟁 촉진을 우선시하는 철학이 자리잡았다.
이런 정책 방향은 1990년대까지는 효과적이었지만 21세기 들어 한계를 드러냈다. 구글, 아마존 같은 미국 플랫폼 기업들과 중국의 국가 주도 기업들이 급성장하는 동안 유럽 기업들은 분산된 채로 남았다. 단일시장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글로벌 경쟁에서는 규모의 열세에 시달리는 모순이 심화됐다. 오늘날 합병 규제 완화 논의가 나오는 배경에는 바로 이런 역사적 경험이 깔려있다.
2001지멘스-하니웰 합병 무산과 유럽의 딜레마
2001년 미국 GE와 하니웰 합병을 유럽 위원회가 저지한 사건은 EU 합병 규제의 전환점이었다. 잭 웰치 GE 회장이 추진한 이 합병은 미국에서는 승인됐지만 유럽에서 제동이 걸렸다. 항공기 엔진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우려한 유럽의 판단이었다. 이는 유럽이 글로벌 기업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가 됐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유럽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 약화를 초래했다. 유럽 항공우주 기업들은 개별적으로는 GE에 맞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에어버스는 정부 지원을 받아 보잉과 경쟁했지만, 엔진 부문에서는 여전히 미국 기업들에 의존해야 했다. 독일 지멘스와 프랑스 탈레스는 각자의 영역에서 우수했지만 통합된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이 국가 주도로 대형 기업들을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중국의 국유기업들은 정부 지원을 받아 유럽 시장에 진출했지만, 유럽 기업들은 합병 규제로 인해 맞대응하기 어려웠다. 통신장비 분야에서 화웨이가 급성장하는 동안 유럽의 에릭슨과 노키아는 개별적으로 경쟁해야 했다. 철강 분야에서도 중국 기업들의 덤핑에 대응하기 위한 유럽 기업 간 통합이 어려웠다.
이런 경험은 유럽 정책 입안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경쟁 정책의 목적이 소비자 보호라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진 유럽 기업들을 방치하는 것도 결국 소비자에게 해가 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특히 디지털 전환 시대에 미국과 중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시장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유럽만의 대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늘날 합병 규제 완화 논의의 직접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2019알스톰-지멘스 합병 좌절과 정책 전환의 신호탄
2019년 프랑스 알스톰과 독일 지멘스의 철도사업 합병이 유럽 위원회에 의해 무산된 사건은 EU 합병 정책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중국 CRRC가 세계 철도시장을 장악해가는 상황에서도 유럽 기업 간 통합이 좌절된 것이다.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 경쟁 담당 집행위원은 유럽 시장 내 경쟁 제한을 우려해 합병을 불허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프랑스와 독일 정부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당시 중국 CRRC는 이미 세계 철도차량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 정부 지원을 받는 중국 기업에 맞서려면 유럽도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프랑스와 독일의 논리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공동성명을 통해 EU 합병 규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들은 '유럽 챔피언' 기업 육성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EU 내부에서 합병 정책 재검토 논의가 본격화됐다. 전통적으로 시장 경쟁을 중시하던 북유럽 국가들도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ASML의 반도체 장비 분야 독점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인한 경험이 있었다. 스웨덴의 에릭슨도 노키아와의 협력 확대를 통해 화웨이에 맞서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런 정책 전환을 가속화했다. 공급망 안보와 전략적 자율성이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고, 경제 안보 차원에서 기업 육성 정책이 정당성을 얻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과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맞서려면 유럽도 국가 차원의 산업 전략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결국 2024년 합병 규제 완화 논의로 이어진 것은 5년 전 알스톰-지멘스 합병 좌절의 직접적 결과물이다.
생각해볼 점
EU의 합병 규제 완화는 70년 유럽통합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이다. 자유경쟁을 통한 시장 효율성 추구에서 전략적 기업 육성을 통한 글로벌 경쟁력 확보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이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속에서 유럽이 선택한 제3의 길이다. 시장 논리와 국가 전략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가는 유럽의 실험이 글로벌 경제질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경제사 작가 Penseur가 작성했습니다. 저서: 《돈으로 읽는 경제사》 외 다수